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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태근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 #06 : 빌립보서 2장 1 ~ 5절
    말씀 2019. 1. 26. 23:58

    빌립보서 21 ~ 5

     

    송태근 목사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분열의 위기에 있는 교회를 어떤 원칙을 가지고, 어떤 원리로 하나 되게 할 것인가를 매뉴얼로 정리해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4절부터 풀어야 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단순하게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시작을 해야 합니다.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이렇게 삶을 풀어내야 합니다 라는 순서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에 대입시켜서 아비의 마음으로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한 번 보세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잘못하면 조건문처럼 보인다. 만약(if) 뭐뭐 한다면, 그런데 영어로 표현하자면 since라는 단어로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 하면 여러분들은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가족임으로 반드시 이래야 합니다 라는 뜻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라는 조건문이 아니다.

     

    지금 1절에서 말하는 네 가지 덕목은 하나님의 자녀된 공동체가 가족의 공동체이던 교회로서의 공동체이던, 반드시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를 견고하게 떠 받치기 위해서 풀어져 나와야 할 덕목들이다. 그 네 가지 기둥을 지금부터 설명을 드릴텐데, 결국은 이것들 때문에 그렇다.

     

    2절을 보세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지난 주까지 설명을 드린 내용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무엇을 계속 강조하죠?

    교회는 일체감을 가지고, 친밀감을 가지고, 한 뜻, 한 마음, 협력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가지 덕목이 필요하다.

     

    교회라는 공동체이든지, 가족이라는 공동체이든지, 그리스도의 자녀가 형성되고 구성된 공동체라면 하나의 마인드(mind)와 한 목표와 한 비전(vision)과 한 뜻으로 봉글지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일이다.

     

    장로교회의 기초 신학사상을 제공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초로 한 소요리문답 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죠? 거기에 보면 일장 일조에 큰 질문 하나가 있다. 사람의 본분된 목적이 무엇인가? 그러면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요.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많이 해서 갖다 바치는 것도 우선적인 가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 한 가족의 부름 받은 공동체가 어떠한 상태로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인가? 한 뜻, 한 마음, 한 공동체로 견고히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빌립보서 21절에 사도 바울이 말한 네 가지 덕목이 자연스럽게 나아와 된다는 이야기이다. 잠언 181절을 보면,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라고 했다. 잠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모든 책을 걸쳐서 지혜는 누구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는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만이 참 지혜이다.

     

    무리에서 나누어지길 원하는 자는 자기의 소욕을 쫓는 자요. 참 지혜를 배척하는 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에서 찢겨 나가기를 원하는 이단 같은 존재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와 같다는 말이다. 그만큼 아주 준엄하게 질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테가 쓴 글을 보면, 지옥이 있는데, 그 지옥이 지하 28층으로 되어 있다.

     

    28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분열주의자들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이 글로 만든 세계나 또 하나님의 성경의 가치 속에서도 가장 하나님이 준엄하게 꾸짖고 싫어하는 행동과 삶의 태도가 뭐냐면 자기 이익을 쫓아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서, 미국에 가면 미국 교회당을 빌려쓰는 한인 교회가 많다. 어느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일인데, 교인들이 늘어나니까 자체 건물도 마련하고 싶고, 이 교회를 어느 위치(location)에 사서 이사를 갈까를 궁리를 하고 의논을 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의견이 안 맞는다. 이것으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결국은 담임 목사도 떠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런 교우가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굉장히 많다. 교회당을 어느 위치에 둘까를 결정하는 것은 참 기쁘고 복된 일인데도 그 이면을 들어가 보면, 의견이 안 맞는 핵심에는 뭐가 있는가?

     

    자기 이익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기의 조그만 편의를 내려놓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이 생기고, 마지막 리더가 떠나야 되는, 이런 아픔을 겪는 교회들이 한 두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지름 빌립보 교회가 직면하는 안팎의 위기는 무디아 집에서 시작된 분열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소식을 접하고, 아픈 마음으로 감옥에서 빌립보서 라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빌립보 1장까지는 그 문제의 핵심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의 설립의 배경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면, 2장에서는 어떻게 빌립보 교회가 하나로, 한 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가야 함을 구체적인 매뉴얼을 설명한 것이다.

     

    첫 번째,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무슨 권면이나 또 사랑의 위로, 굉장히 표현들이 유사성이 있고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우선 무슨 권면이나 라는 말은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이다.

     

    사도행전 432 ~ 26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우리가 바나바는 알았는데, 바나바의 원래의 이름이 요셉인 줄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바나바는 요셉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다. 또 다른 별칭이다. 바나바는 위로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라클레토스 라는 단어가 나온다. 성령님의 또 다른 별명은 보혜사이다. 보혜사 라는 말이 위로자라는 뜻이다. 파라는 옆에 계시다이고, 클레토스는 옆에서 위로하시는 분이다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는 교회를 향해서 첫 번째로 던지는 덕목은 위로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위로는 굉장히 소극적인 위로이다. 소극적인 위로가 진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옆에 조용히 파라클레토스로 있어라. 이것이 무슨 권면이나 라는 말 뜻이다.

     

    두 번째 덕목

    사랑의 무슨 위로.

    사랑의 무슨 위로는 적극적 위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달래는 위로를 얘기하는 것이다. 조용히 달래는 위로이다.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는 모두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전달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야보고서 기자가 소개한 것처럼 굉장히 중요하다. 혀의 권세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 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해요.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 귀에 들리는 대로 행하리라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많이 하나님 앞에 원망, 불평을 터뜨렸던 고백은 이래서 죽겠고, 저래서 죽겠고, 이래서 못 살겠고, 저래서 못 살겠고 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조현삼 목사님.

    감자탕 교회의 목사님 아시죠?

    그 분이 쓴 책을 보면, 언어의 창조성에 대해서 그분이 굉장히 말이 직설적이고 또 파괴적이고 거칠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크게 깨닫는 계기가 되어서, 그분의 얘기를 들어보면 매일 봄바람 같다. 말이 따뜻하다. 그래서 그 교회를 가보면 온 교인들이 행복하다. 언어가 바뀌니까. 가정도, 교회도, 사람과 사람 사이, 직장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제일 먼저 하나가 되는 첫 번째 단초는 위로의 말, 사랑의 위로, 그래서 언어가 바뀌는 것이다.

     

    세 번째 덕목.

    성령의 무슨 교제나.

     

    요한일서 16 ~ 7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령님이 임하면 제일 먼저 진리를 열어 주신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도록 한다. 성령님은 진리와 결부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지하는 관계인가? 하나님의 지지하는 원리인가? 이것이 우선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교회를 진리의 공동체라고 한다. 교회가 모이는 원리가, 교회가 세워지는 원리가 성경의 원리가 기초되지 않을 때, 사회단체하고 다를 바가 전혀 없게 된다.

     

    성령의 교제는 진리에 기초한 관계이다.

    소속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점검해야 하고, 이것이 진리가 지지하는가를 점검할 때, 옳은 윤리인가? 옳지 않은 윤리인지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성령의 교제할 때는 한 마음, 한 뜻되게 하는 것이 진리 위에 세워졌는가를 반드시 점검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 덕목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만찬.

    예수님의 몸을 찢는 사건을 상징화한 오병이어.

    보리빵으로 오신 예수님.

     

    베들레헴.

    베들 :베이트의 집, 레헴 :

    베들레헴은 빵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빵집으로 오셨다.

    생명의 빵으로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빵()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어서 굶주리고 들녘에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먹이시고,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의 사명은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영혼들을 먹여 살리기 전에 중요한 동기가 있다.

     

    아주 중요한 동기가 있다.

    민망이 여기사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다.

    해질 무렵 들판에 앉아 있는 죽어가는 영혼, 영혼의 양식을 애타게 찾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민망이 여기셨다.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의 아픔이다.

    이런 느낌을 갖는 관계는 어느 관계에서만 가능할까?

    가족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가족은 이 아픔을 느낀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이 지상의 교회를 향해서 가족의 관계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한다. 하나님이 가끔은 교회에 시련도 주시고, 어떤 미션(mission)도 주신다. 그런데, 1차적인 목적이 실연 자체에 있지 않고, 미션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시련과 미션을 통해서 하나의 집합체가 가족으로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신다.

     

    교회는 청중으로 머물러서는 절대 안된다.

    교회는 가족으로 들어가야 한다.

    교회는 가족으로 자꾸 만들어져야 한다.

     

    빌립보서 23 ~ 4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3 ~ 4절은 태도를 말한다.

    어떤 태도로 가족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허영이라는 말은 케노독시아(헬라어)로 텅빈 영광이라는 뜻이다.

    텅빈 영광.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의 영광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섬기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열심의 동기가 중요하다.

    그 열심의 동기가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는 동기일 수 있다. 열심히 하되 자꾸 사람이 나오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텅빈 영광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다섯 번째 : 남을 낫게 여김

    앤드류 머레이의 책

    겸손이란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태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수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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